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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섭] 와꾸순애보 -1

포스틧 2017. 2. 18. 03:01


1

 

 

[사랑이 끝나는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허무하다. 단절된 감정 하나하나의 나열이 아니라 예전부터 켜켜이 쌓인 감정의 분출이 이별이기 때문에 언제 크레딧이 내려갈 지는 상대도 자신도 모를 수 밖에 없다. 온갖 달콤한 대화들로 시작한 처음과 다르게 연애의 마지막에는 그런 추억은 없다는 듯 날 선 거절 혹은 절절한 애원들로 가득해 온 세상이 다 쓰다.

 

그렇게 허무한 이별을 올해 벌써 세번째로 꿋꿋이 해내는 이씨 가문 독자 이창섭, 너 대단하다.]

 

 

 

 

 

염병하네.”

 

 

, 육성재 망할 놈. 저게 내 다이어리 또 봤다. 내 방에 처박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수상해서 밥 볶다 말고 와봤더니 숨겨둔 서랍 열쇠는 어떻게 찾았는지 굳이 따서 저 지랄이다. 지 성격마냥 개차반인 감상평은 보너스로 남겨두고 날 보는 표정이 심히 좋지가 않다. 내 다이어리 훔쳐 본 건 저 새끼 잘못인데 왜 지 표정이 안 좋으신지. 문창과 감수성 개무시하네.

 

 

욕할 거면서 왜 또 쳐봐.”

또 깨졌냐, 멍충아.”

“..어쩌다보니.”

누가 문창과 아니랄까봐 바람 펴서 차인 거에 지까짓거 감수성만 존나 처넣었네.”

아니! 이번에는 진심 바람 안 폈어.”

퍽이나 새끼야. 난 또 박주희 얼굴 어떻게 봐.”

 

 

남이사 이별을 하든, 이혼을 하든, 지가 뭔 상관이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새끼 분명히 박주희한테 마음 있었다, . 내가 먼저 꼬시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육성재랑 박주희랑 붙어먹는 꼬라지 보고 열통 터졌을 뻔 했네. 인간관계가 한 층 더 좁아지는 바람에 내 침대 위에서 괴로워하는 육성재에게서 다이어리를 뺏어들고 다시 밥이나 볶으러 갔다. 식탁 위에 다이어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다시 프라이팬을 잡는데, 이거 참 기분 더럽긴 하다. 나는 지 좋아하니까 싹수 노란 주변 여자애 다 치워놓는데 정작 짝사랑의 주인공인 저 새끼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내 상황을 다 아는 척 한다. 망할, 먼저 좋아하는 게 죄지. 안 그래도 주희고 지현이고 미안해 죽겠구만.

 

 

밥 다 됐냐?”

 

 

에라이, . 배 벅벅 긁으면서 밥 때 되면 나오는 저 빈대 같은 자식이 얼굴은 더럽게 잘생긴 게 제일 짜증난다. 저 놈의 외모만 없었어도 나는 좀 더 모럴한 삶을 살았을 거고 육성재의 인간관계도 폭넓고 다양했을 거다. 일단 저 새끼가 저런 와꾸로 태어난 것부터 내 인생 망조의 신호였다. 어렸을 때부터 예쁜 거, 잘생긴 거 존나게 좋아했던 이씨 가문 독자 이창섭은 다니던 유치원에 새로 온 전학생의 얼굴만 보고 그 자리에서 청혼했으니, 그게 이창섭 얼빠 인생에 짝사랑이라는 MSG가 첨가되는 순간이었다. 살면서 더 잘생겼거나 예쁜 사람을 봤으면 애진작에 짝사랑을 종결지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전학생의 외모는 독보적이었던 터라 이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짝사랑은 진행 중이다. 게다가 저 얼굴을 빼고라도, 이십년 동안 쌓아온 정이 뭐라고 쉽게 감정이 접히질 않는다. 지금 내 앞에서 추접스럽게 온갖 밥풀은 다 묻히고 열심히 먹는 육성재도, 시발, 사랑스럽다.

 

 

, 이번에 너네 과 신입생 존나 잘생겼다며.”

그런 거 본 적 없어.”

? 존나 유명하던데. 그 눈 높은 임현식도 인정함.”

미친. 이름이 뭐래.”

그 정일훈? 장일훈? 여튼 그런 이름이었음.”

드디어 육성재의 시대가 가는 건가.”

나 아직 안 죽었다. 오늘도 번호 따임.”

 

 

아니, 이 씹새가 뭐라는 거야. 그래서 번호를 줬냐고 물으니 지 스타일 아니라서 안 줬단다. 목구멍이 콱 막혀서 죽어도 안 넘어가던 밥덩이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술술 넘어간다. 세상에, 팔자에도 없는 여자를 또 울릴 뻔 했어. 육성재를 만나고 지금까지 이십년 동안 이창섭 인생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도덕이 있는 삶. 무슨 뜻이냐 하면 불알친구 인간관계망의 XX염색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뜻이다. 고로 저 새끼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애정을 듬뿍 담아 빤히 쳐다보면 뭘 쳐다보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못 하는데 보지도 못 하게 하냐. 육성재 개자식.

 

 

, 나 먼저 간다.”

이도 안 닦고 가?”

아아, 괜찮아. 한 두 번이냐.”

 

 

저러다 어금니고 뭐고 다 홀딱 썩어버리지. 내가 좋아하는 개자식은 삼십분 후에 자기 전공이라고 백팩 챙겨서 나가 버렸다. 이번 시간표는 수강신청 날 피씨방 컴으로 완벽한 시간표에 도전하겠다며 나갔다가 오랜만에 한 메이플 스토리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놓쳐버린 육성재 때문에 씨발스럽게도 제각각이다. 십 년만에 플레이한 메이플 스토리는 저 새끼에게 공강을 가져다주지 못 했고 나 새끼에게는 육성재를 가져다주지 못 했다. 피씨방 귀찮다고 안 따라나간 내 잘못이지. 저 헐렁한 놈의 무엇을 탓하겠어. 육성재 오늘 술 약속도 있다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일 텐데. 노잼이네.

 

 

 

 

 

 

//

 

 

 

 

 

 

그러니까 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무엇이냐 하면 육성재가 없어 외로운 나를 적절한 타이밍에 임현식이 불러서 술 마시러 나와 있는 상황이긴 한데, 술 마시는 데에 빠진 적을 본 적이 없는 동근이랑 임현식의 소울메이트 은광이 형이 있는 건 오기 전부터 예상했지만 남아 있는 한자리가 누굴까. 육성재일 가능성은 희박한데. 내가 온다고 저렇게 잔에 젓가락까지 세팅할 사람들은 아니고. 궁금증을 참지 못 하고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물어봤다. 누구 또 있어?

 

 

, 1학년 남자앤데 너를 존나 보고 싶어하길래.”

미친? 나를 왜.”

너 예쁘대.”

“..?”

화장실 간다 그랬는데..., 저기 오네

 

 

잠깐 동안 진행된 임현식과의 대화가 평범한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진 않지만 억지로라도 뇌세포를 혹사시켜보자면 내가 예쁘다는 특이 취향의 신입생이 지금 화장실 갔다가 온다는 말이지? 누군지는 몰라도 눈깔이 발바닥에 달려 있는 새끼라고 생각하며 구석탱이에서 걸어오는 얼굴을 보는데, . 잘생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웃음을 살살 날리며 00학번 정일훈이라고 소개하는 1학년은 확실히 얼빠 이창섭 기억에 제대로 박혀버렸다. 이름을 들으니 몇 시간 전, 육성재가 말하던 애인가 본데 확실히 존잘이다. 잘생긴 얼굴에는 대놓고 약한 편이라 술 마시면서도 계속 쳐다봤다. 정작 내가 보고 싶었다던 본인은 내 시선이 꽤나 따가웠는지 이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고 굳어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보다 못 한 은광이 형이 상추로 내 눈을 가리고 나서야 정일훈은 내 쪽을 쳐다볼 수 있었고 그제 서야 정일훈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뭐, 이런 거.

 

 

너 나 알고 있었다며?”

, 너무 예쁘셔서. 처음에 여자인 줄 알았어요.”

미친놈. 눈에 서리 꼈구나.”

 

 

아니면 이런 거.

 

 

..선배님.”

그냥 형이라고 해.”

..그래도 될까요?”

괜찮아. 잘생겼으니까.”

보는 눈이 지하 3층을 뚫으셨네요.”

 

 

임현식과 술고래들이 지들끼리 놀거나 말거나 눈이 바닥에 달린 정일훈과 상추로 눈을 가린 나는 서로의 와꾸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정일훈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재밌는 놈이기까지 했고 나를 꽤나 좋아했다. 좋은 후배 하나 생긴 것 같은 기분에 흥에 취해서 주량을 넘긴 채로 술자리를 마무리 했다.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아쉬웠던 젊은이 다섯은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노래방까지 안전하게 도착했고 음악에 몸을 맡겨버렸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에 뻗어버린 뇌를 일으켜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새벽 2시쯤이었다. 첫차와 함께하는 귀가를 주장하는, 군 입대를 앞둔 신동근이와 미자 뗀지 1년이 채 안 되어 팔팔한 정일훈이의 칭얼거림에도 불구하고 체력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늙다리인 나와 임현식은 사이좋게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이럴 때마다 음주메이트인 친구와 사는 동네도 같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다크가 턱까지 내려온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나름 작별 인사라고 어깨를 톡톡 치고 각자 제 갈 길로 빠진다. 알콜에 절다 못 해 녹아버린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여니 불 꺼진 집 안에서 뭔가 커다란 게 다가온다.

 

 

“..오옥? 육썽대? 너 약속 취소야아?”

왜 전화 안 받아.”

뭐야아, 전화 했어? 못 봤다아.”

너는 애가..술 마시러 간다고 말도 안하냐.”

미아내애.”

사람 걱정 다 시키고 미안, 하면 다야?”

아이고오오. 죄송합니다아아. 죽을 죄를 지었네요오오.”

 

 

이게 아닌가. 바닥에 주저앉아 석고 대죄하는 나를 육성재가 벌레 보듯이 쳐다본다. 세상에, 벌레라니. 나 그렇게 징그럽지 않은데. 빤히 내 얼굴을 보던 육성재가 한숨을 쉬더니 나를 들쳐 업어 내 방 침대에 내려놓는다. 아무래도 이 상태에서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거 참. 짝사랑 상대에게 추한 꼴은 다 보여주네. 불 끄고 문을 닫으려는 육성재에게 아직 안 잘 거라고 찡찡거리자 정강이를 까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 완전 성격파탄자야. 잠이 안 온다니까 자꾸 자래. 아니, , 컴컴하니까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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